시골에서 자랐지만 나무 이름이며 풀꽃 이름을 너무 모른다. 농사를 지을 줄은 더욱 모른다. 나무와 풀꽃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거니와 농사를 거들지 않고 그저 놀다가 공부하는 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리라. 워낙 아는 것이 없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랑 텃밭 농사도 짓고 나무와 풀꽃을 배우려고 쫓아다니기도 했다.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끝내 도시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 도시에서 수십 년 동안 살고 있다 보니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득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과감하게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높아 보인다. 작가가 도시를 떠난 계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자연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안에서 씨앗이 무르익어 씨방이 터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가슴속 열망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단을 했다는 것이다. 삶터를 옮기는 데 발목을 잡는 것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그러나 몸이 축날 정도로 힘든 지게질을 하면서도 운동이나 놀이를 하듯 일하는 남편이나 환갑을 바라보는 큰외삼촌에게 자연의 스승이 되는 아이를 볼 때 식구들의 동의와 지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몸을 옮기고 나자 자연의 도처가 학교이고 만물이 공부거리였다. 가뭄에 타던 풀포기가 단비 빨아들이듯 한껏 배우고 겪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곤조곤 풀어냈다. 앵두와 블루베리도 거의 동시에 익어가요. 새들이 이 풍요로운 시기를 놓칠 리가 없지요. 아침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나무들 사이로 식사를 하로 온 새들의 날갯짓이 바쁩니다. 이 무렵 새들은 새똥마저 총천연색으로 눠요. (139쪽) 암사마귀는 한낮이 되어서야 배가 홀쭉해져서 데크 난간 위로 올라섰습니다. 제 몸보다 더 큰 알집을 난간 아래 단단하게 붙여놓고요. 알 낳는 데 거의 24시간을 바치더군요. “너도 어미구나……. 이제 한 생의 몫을 다했으니 어디든 가서 쉬렴.” 짠한 마음으로 중얼거린 것은, 아마도 같은 어미, 같은 암컷으로서의 동질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162쪽) 새들이 깃든 나무는 특별해요, 어린 나무, 키 낮은 나무에는 깃들지 않아요. 키는 크지만 가지가 엉성하여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나무도 제외됩니다. 안정적인 몸체에 넉넉한 가지를 뻗은 나무, 잎새가 무성해 몸을 숨길 만한 나무, 여럿이 모여 체온을 나눌 수 있는 큰 나무……. 새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나무를 아는 것 같아요. (168쪽) 시골에 살면 시간의 흐름이 도시와 다르다. 시계에 의존하는 도시의 삶은 쫓길 수밖에 없지만 자연의 흐름을 타야 하는 시골살이는 생체리듬에 맞춰 살아갈 수 있다. 바쁜 농사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자연을 몸에 받아들이고 새기며 깊이 바라볼 수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선입견과 거부감, 쉬운 단정, 게으른 합리와의 습관을 멈추고 결과 앞에서 과정과 맥락을 들여다보는 태도, 존재의 심연에 닿고자 하는 열망과 호기심”으로 “사물의 겉모습을 뚫고 본질을 파악”하여 “너와 나 사이의 이해와 공감을 넓히는 첩경”에 다다른 듯하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작가의 모습이 또 다른 자연인 듯 넉넉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연의 풍경과 언어의 풍경을 오가며 마주친 삶의 기척들도시에 살면서 10년 넘게 인문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해온 저자는 어느 날 가슴속 열망을 주체 못하고 훌쩍 삶터를 옮겼다. 책을 일구는 대신 땅을 일구며 자연에 깃들어 산 지 어느덧 10년, 거대한 생명계 안 그물코 하나로 존재하는 자신을 깨달으면서 그의 내부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 . 밖에서 볼 땐 갑작스러웠겠지만 안에선 씨앗이 무르익어 씨방이 터지는 것과 같았지요. 목마름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내 손으로 우물이든 물웅덩이든 파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인간사의 상실을 견딜 만하게 해준 것이 자연의 기운이라면 비좁은 사고의 틀에 균열을 일으켜 자유의 맛을 알게 한 것은 책의 힘이었지요. - 「책머리에」오랫동안 책 더미에 파묻혀 살았지만, 자연의 미지를 탐색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책 읽기는 이전과는 다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외적 요구, 직업적 의무로 혹은 ‘읽어야 한다’는 강박 으로 권수를 쌓아가던 읽기에서, 천천히 여행하듯이 마음을 열고 자신을 온전히 느 끼는 읽기로 전환한 것이다. 자연에서 읽다 는 자연 안에서 자연의 기미들과 삶의 무수한 기척들, 저자를 뒤흔들고 설레게 한 책들을 마주한 순간들을 담은 책이다. 어느 순간 낚싯바늘에 꿰이듯 저자의 마음에 걸려 올라온 70종 가까이 되는 책의 인용문들은 남의 글을 끌어 오는 것 에 그치지 않고, 자연 안에서 발생한 사유에 깊이를 더한다. 관찰과 사색을 오가는 곳곳 절묘하게 놓인 시와 산문, 인문서의 문장들은 독자들을 더 넓은 독서의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책머리에 _ 문장에 마음을 베이다
봄
처음 만난 풀꽃들과 낯을 익히다
_도시내기의 자연살이 첫 공부
내년 봄에 또 얻어먹을게요
_자연에 기대어 사는 고마움
세상 꽃이 한 가지만 피던가요
_푸른 밥상 차리며 다름의 미덕을 기억하다
둥지는 떠나기 위해 있는 것
_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세계
짧은 순간 빛나기에 아름답다
_봄꽃을 보며 ‘이 한 개의 봄’을 생각하다
여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내가 변한다
_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지요
홀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_땅 밑, 땅 위에서 그들이 사는 법
한 알의 씨앗은 오래된 미래
_토종으로 지키는 종자 주권
우리의 살은 그들의 살이다
_굳어진 관념을 깨는 살림의 감정
잘 썩는 것은 좋은 일
_먹을거리 갈무리하며 부패를 생각하다
가을
풀은 메마르고 벌들도 돌아간다
_작은 곤충들의 경이로운 세계
멈춰 서면 많은 것이 보인다
_혼자 고요히 머물러 살피다
아이의 눈물은 가볍지 않아
_병아리를 보며 어린것들을 떠올리다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
_서로에게 물들며 진화하는 삶
세상의 중심은 ‘나’가 아니다
_별을 보며 지상의 삶을 돌아보다
겨울
욕망의 시대에 사라지는 것들
_불을 지피며 숲을 생각하다
새들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아
_혹한에도 꺾이지 않는 야생의 삶
껴안기 좋은 아름다운 손가락
_연필을 깎으며 손을 사색하다
천천히 읽는 즐거움
_겨울 다락방에서 책 읽기
없음에서 있음으로, 다시 없음으로
_늙음을 앓으며 돌아감을 이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