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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jvva 2021. 1. 1. 07:42

나 여기 있어요

혼수상태인 몸에 갇힌 여자,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남자에게 봄처럼 찾아온 사랑이야기 《나 여기 있어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먼저 든다. 얼마 전 영화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천우희, 김남길 주연의《어느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아내를 잃고 희망을 잃은 채 마음을 닫았고, 여자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이다. 이렇듯 두 작품은 주인공의 설정이 많이 닮아 있다.내용의 전개면에서 상당히 다른 두 작품의 주인공이 닮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해답을 이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 여기 있어요》는 혼수상태인 엘자와 그녀의 병실에 우연히 들어서게 된 티보의 사랑을 담은 프랑스 소설이다. 엘자는 등반사고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6주가 되었다. 물론 6주가 흐르는 동안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정신만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몸에 세 들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남은 건 청각 뿐, 그녀는알맹이가 쏙 빠진 빈 고치 속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조차 슬슬 손을 놓기 시작했고, 매주 수요일마다 그때그때 사귀는 남자와 함께 병실에 나타나는 여동생만이 꼬박꼬박 찾아오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한 남자가 병실을 잘 못 찾아왔고 엘자는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6년동안 함께하다가 1년 전 신디와 갈라서는 일생일대의 타격을 입고 일에 파묻혀 살던 티보는 한달 전부터 어머니를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 모시고 가지만 절대 병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동생의 사고로 두 명의 여자가 목숨을 잃은 탓에 그에게 분노하고 있는 탓이다. 오늘도 여지없이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비상계단으로 향하던 그는 표시를 착각한 탓에 한 웬 병실로 들어가게 된다. 재스민 향이 나는 혼수상태인 그녀는 마침 오늘이 생일이었고 티보는 그녀에게 생일 축하 뽀뽀를 건네고 병실에서 잠이 든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답이 바로 떠오른다. 마치 이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단박에 치고 올라오는 답이 있다. 나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지금은 생각에만 적합한 상태다. 내가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눈을 뜨고 내 망막이 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버텨야 한다. (본문 110p) 엘자에게 티보는 유일한 흥밋거리, 유일하게 새로운 것, 그리고 아직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고, 티보는 그녀에게 몇 마디 건네 후 어김없이 잠이 들었지만 병원 가는 길이 즐거워졌다. 그러다 불편한 의자 대신에 그녀의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자게 되고 엘자는 티보의 체온만이라도 느끼고 싶은 마음에 정신훈련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청소아주머니는 음악소리에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생각한 엘자에게서 소리를 듣게 되고, 티보가 데려온 친구의 아기를 오해하고 억장이 무너짐을 느꼈을 때, 티보가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도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의사는 가족들에게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결정을 요구한다.동생의 자살로 절망에 빠져있던 티보는 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서둘러 병원에 가게 된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 지금 당장은, 내가 가장 제정신으로 저지른 일인 것 같다. (본문 186p) 영화 《어느 날》을 알지 못했다면 이 설정이 꽤 독특하다고 생각되었을 듯 싶다. 마음을 닫은 남자, 혼수상태인 여자와의 로맨스는 독특하면서도 자못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비현실적인 느낌도, 어두운 현실이 가진 무게감도 느낄 수 없었다. 보통의 로맨스에서흔히 보여지는두 주인공의 꽁냥꽁냥하는 달달함 대신 엘자와 티보가 서로 교차되면서각자의 심정을 풀어내고 있음에도 이 소설에는 애틋함이 담뿍담겨진 로맨스가 있었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설정이나 두 사람의 무거운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부분에서 저자의 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는 긴박함이라니. 《나 여기 있어요》는 모두가 혼수상태인 엘자에게 남은 2%의 희망마저도 포기한 상황에서 상처로 마음을 닫아버린 티보와 엘자가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 애틋하게 담긴 소설이다. 영화 《어느 날》과 이 소설의 주인공이 닮아 있는 것은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옮겨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말이다. 어쩌면 저자는 두 사람의 애틋한 로맨스 속에서 우리들에게 희망, 사랑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이 소설은 내게 그동안 쉽게 읽어내려가던 여타의 로맨스 소설과는 다르게 다가온 작품이었다.

얼음산 등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지 20주. 이제는 병실을 찾는 발길도 점점 줄고, 의사는 가망 없다는 선고를 내리며 가족들에게 연명 장치를 제거할 날짜를 잡자고까지 한다. 가망 없는 환자 엘자, 사실 그녀는 6주 전부터 이 모든 상황을 알아채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와 자신에게 건네는 말, 청소부 아주머니의 라디오 소리 등을 통해서. 그녀에게 남은 감각은 오직 청각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직 여기 살아 있음을 아무리 외쳐보지만 전할 길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법처럼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음주운전으로 소녀들을 죽인 동생을 피하려다 우연히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남자 티보. 그는 그녀에게서 나는 재스민 향에 호기심을 느끼고 침대에 걸린 차트를 통해 그녀가 세상 가장 무서운 단어 중 하나인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며 오늘이 하필 생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다 그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드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후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병실을 찾고 싶어진다. 특히나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날엔.

혼수상태인 몸 안에 갇혀 버린 여자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고 마음을 꽁꽁 닫아 건 남자가 사랑에 빠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 소설은 말도 안 된다 싶을 만큼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사랑의 과정을 감각적으로,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고 응원하고 싶을 만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2015 새로운 인재상을 수상하며 프랑스의 촉망받는 신예로 떠오른 클레리 아비의 데뷔작으로 전 세계 22개국 이상에 판권을 판매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